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알 아문센 (문단 편집) === 벨지카 호 탐험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359.jpg|width=100%]]}}}|| || [[벨기에]]의 남극 원정대(1897 ~ 1899)에 합류했다가 돌아올 때 [[오슬로]]에서 찍힌 사진 || 1897년 6월에서 1899년 5월에 걸쳐서 첫 탐험에 나섰다. [[벨기에]] 탐험대에 일등 항해사로 참가하였으며, 이때 탐험선은 아드리안 드 게를라슈(Adrien de Gerlache,1866~1934)가 지원하는 벨지카 호였다. 아문센은 최초로 남극 썰매 여행을 체험하고, 남극 탐험의 야영지 생활을 경험했다. 하지만 남극해가 얼어붙는 바람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때 탐험대는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몰살당할 뻔했다. 아문센은 선의[* 선박에 배속되어 선원과 승객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인 [[미국인]] 프레드릭 앨버트 쿡(1865~1940)과 상의해 [[펭귄]]과 바다표범을 잡아 식량으로 삼아서 위기를 넘겼다.[* 신선한 날고기를 먹어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도 괴혈병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육식동물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도 날고기에 있는 비타민 덕분이고, 범선시대에 괴혈병에 걸린 선원들이 쥐를 잡아먹어 괴혈병이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대장인 드 게를라슈는 물개 고기와 펭귄 고기를 먹는 것에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금지하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이들 모두가 괴혈병으로 죽을 뻔 했지만, 게를라슈도 결국 괴혈병으로 쓰러져서 침실을 떠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선원들은 아문센과 쿡 박사의 말을 따를 수 있었다. 아문센은 기회가 오자마자 벨지카 호를 떠나 우편선을 타고 귀향해버렸다. 그리고 아문센은 아드리안 드 게를라슈의 무능함에 너무나 질린 나머지, 그 뒤로 평생 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게를라슈에 대해 첨언하자면, 그래도 벨기에에선 아문센 못지 않은 탐험가랍시고 온갖 찬양을 해댔고, 그 결과 남극 벨기에 기지에 게를라슈 기지, 캐나다 북동쪽에 게를라슈 섬이라든지 온갖 탐험지나 지명에 그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국제적으로 아문센과 견주자면 무명이었지만... 게를라슈는 이후 그린란드나 남극 탐험에 나섰으나 여전히 펭귄이나 여러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남에게 강요하는 등 온갖 논란을 일으켜 1909년 그린란드 탐사 이후 극지방 탐험 일을 은퇴해야 했고, 자신의 탐험대 항해사이던 아문센이 세계 곳곳에 이름을 알릴 때 모든 탐험 활동을 접고 결혼해 아들을 낳아 [[책]]이나 쓰며 조용히 살다가 갔다. 게를라슈의 아들인 가스통 드 게를라슈(Gaston de Gerlache, 1919~2006)는 아버지가 남극 탐험을 망쳤다는 오명을 씻고자 딱 60년이 지난 1957년에 벨지카 호가 갔던 곳을 벨기에 탐험대를 이끌고 탐험했다. 그리고 남극기지를 세웠으나 도중에 수송기가 추락하여 하마터면 아버지 때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 승무원들과 같이 조난당해 죽을 뻔 했다. 그러다가 근처 [[소련]] 기지에서 보내준 항공기가 이들을 발견하여 겨우 구조될 수 있었고 이 와중에 무모한 일정을 잡았다는 비난을 받아 이후로 아버지와 같이 일찌감치 탐사대장을 그만두고 돌아와 책이나 쓰며 연구활동이나 하고 살아야 했다. 그나마, 이들 탐사대 일부가 남극에서 발견한 2,400미터짜리 산에 Mount Gaston de Gerlache, 즉 가스통 드 게를라슈 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서 남극에 그 이름이 영원히 남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아주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그러나, 아버지 역시 벨기에 측 찬양으로 이름이 지어진 섬이나 기지 이름이 있으니. 결국 아버지와 아들 모두 벨기에나 알아주지 해외에선 무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